고려 현종 이후 전라도 정명 1천년을 맞아 2018년 광주ㆍ전남ㆍ북도가 24억원을 들여 편찬한 ‘전라도천년사'(전 34권)가 친일식민사관이 짙게 배어 있다는 비판과 폐기여론이 거센 가운데 평소 한국고대사 분야에 깊은 연구를 해온 김상윤 선생이 최근 자신의 SNS에 연재한 ‘<전라도천년사> 무엇이 문제일까요?’를 본지에 18회 연속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전라도천년사> 집필진들은 우리 고대사 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어쩔수없이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고, 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기록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김상윤
남당 박창화는 1924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왕실도서관 서릉부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 수장되어 있는 책 중 우리나라에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필사하여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중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 8배 분량이나 된다는 <고구려사략>, 그리고 백제에 대한 기록인 <백제서기>와 <백제왕기>, 신라에 대한 기록인 <신라사초>와 <화랑세기> 등이라고 합니다.
특히 <고구려사략>은 고구려 역사서인 <유기> 100권의 일부라고 추측할 수 있어서 매우 소중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랑세기>만 번역되어 있고, 다른 자료들은 전혀 번역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주류 강단사학계는 박창화가 필사해온 자료는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군요.
‘단군세기’나 ‘북부여기’ 등이 들어 있는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폄하하거나, 박제상의 저술이라는 <부도지>를 믿지 않는 경우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런데 주류 강단사학계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료들 속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류 강단사학계는 ‘나라 영역이 커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거나, ‘우리 민족이 꼭 위대하다고 해야 좋은 것이 아니다’는 뜻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마치 재야사학자들이 일반인들의 ‘맹목적인 애국심’ 에 호소하여 우리 역사를 유구하고 대단한 것처럼 ‘만들고’ 있다고 매도하려는 의도이겠지요.
ⓒ김상윤
그런데 위 사료들에는 실제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많습니다.
결국 위 사료들을 제대로 활용하면 주류 강단사학계의 역사 체계가 일시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시급히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7명의 연구자들에게 <일본서기>를 번역하게 하고 주를 달아 펴냈습니다.
<일본서기>가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책이어서 그랬을까요?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면 무엇보다도 중국 정사의 하나인 <금사>를 먼저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금사>는 신라 사람인 ‘금’함보를 자신들의 시조라고 하였고, 따라서 나라 이름도 시조의 성을 따라 ‘금’이라고 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이성계가 왕이 된 이후 금씨는 김씨가 되었습니다.)
<흠정 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책으로, 우리 역사의 무대가 만주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의 8배나 되는 분량이고, <유기>의 일부로 추측되며,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많다고 하니, 정성을 다해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러한 사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흠정 만주원류고>는 만주족의 자존감을 높이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고, <금사>는 중국 정사 중 가장 가치가 적다는 것이 번역도 하지 않는 이유입니까?
ⓒ김상윤
그러면 <일본서기>는 황국사관을 위해 쓴 책이 아니어서 정성스럽게 번역한 것인가요?
주류 강단사학계는 자신들의 이론 체계를 고수하기 위해 사료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들만 선택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재야사학자인 정재수는 박창화가 필사해온 사료의 가치를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백제서기>나 <백제왕기>를 이용하여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여러 사실을 밝혀냈고, 마침내 <백제 역사의 통곡>을 쓸 수 있었습니다.
<신라사초>를 활용하여 <신라 역사의 명암>을 쓴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사략>을 활용하여 <새로 쓰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썼습니다.
<고구려사략>에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사적이 매우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최재석의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을 보면, <일본서기>는 금속활자본은 하나도 없으며 전부 필사본으로서, 현존하는 것이 40여 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고본과 신본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필사본 사이에도 다른 곳이 많아 에도 시대(1603-1868) 이후 많은 교정 판본이 나왔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서기>는 그동안 계속 자의적인 수정을 많이 가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곳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상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창화가 필사해온 사료나 중국 정사인 <금사>나 <흠정 만주원류고>는 무시한 채 <일본서기>’만’을 애지중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고대사 사료가 너무 부족해 <일본서기>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식민사학의 물줄기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 답답해서 ‘나이 많은 독서인’이 주류 강단사학자들인 그대들에게 묻습니다.
김상윤 님의 SNS보기: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5169631571
<전라도천년사> 누리집: http://www.jeolladohistory.com/
출처 : 광주in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