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칼럼은 필자가 지난 6월 23일(금) 사단법인 《대한사랑》이 ‘국경사(國境史) 연구로 반도사관(半島史觀)을 혁명한다’ 라는 주제로 주최한 ‘2023 대한국제학술문화제’에서 ‘한일 간의 독도문제’가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그 배경을 밝히는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과 미국의 독도정책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를 주최한 《대한사랑(윤창렬 이사장)》은 2014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어 잃어버린 우리 문화와 역사를 되찾고, 한국사의 국통맥을 바로 세워 대한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국내 유일의 역사문화운동 단체다. 대한사랑은 이번 학술대회처럼 매년 국내와 해외 유수 학자들을 논문 발표자로 초청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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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이하 대일평화조약: Peace Treaty with Japan)은 전후 연합국 48개국과 일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관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했다. 이 조약이 이듬해 4월 28일 발효되어 일본은 주권국가로서 독립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일평화조약이 동아시아 냉전이 격화되어 가던 중에 체결된 것으로 미국의 대동아시아 냉전전략이 일방적으로 반영되어 70년 넘게 오늘날까지 ‘샌프란시스코체제’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 역내 국제질서체제를 규정하고 있다.
대일평화조약 체결부터 시작하여 2023년 오늘날까지 72년 간 한일 관계를 규정한 프로토콜의 한 축은 바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의 분쟁이다. 독도분쟁은 대일평화조약 중에 영토조항 제2장 제2조((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에서 독도에 대한 언급 없이 체결되자, 한일 양국은 소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기 논리를 주장하며 갈등과 대립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까지 독도에 대한 국내 연구는 역사적 권원(고유영토론)의 문제와 국제법적 접근으로 일본의 주장 논리를 반박하는 방어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72년 동안 두 가지 접근방식은 독도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는 커녕, 한일 양국 간 갈등과 대립을 격화시켜왔다. 뿐만 아니라, 독도문제는 국내정치와 연동되어 한일 양국의 정권 지지율의 반등을 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위, 종속 변수화 되어왔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독도문제의 본질이 역사적 권원의 문제도 아니요, 더구나 국제법상의 문제가 아님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 간의 독도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된 소위 무정부 상태 하에 국가 간 이익으로 규정된 냉엄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빚어낸 산물이었던 것이다. 독도에 대한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일 간의 독도문제가 발생하게 된 본질적인 원인은 종전 후 미국이 주도한 대일본영토정책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연합국을 대표한 미국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주리함상에서 항복조인식, 즉 다르게 표현하면 태평양전쟁이 종결되었다고 하는 종전(終戰)조약에 서명했다. 이를 다시 영구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평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미국 주도의 대일정책 원칙에 기초한 영토처리에 관한 정책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독도가 한일 간의 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일영토정책은 대일평화조약 체결 전(前)과 후(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를 다시 대일평화조약 체결 전(前)단계를 3단계로 세분화하여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전시 중 미국 주도의 대일영토정책을 구상하고 확정(1941년~1945년)한 시기다. 전시 중에 대서양선언(1941.8.4.), 연합국 공동선언(1942.1.1.), 카이로선언(1943.12.1.), 얄타회담(1945.2.11.), 포츠담선언(1945.7.27.) 등으로 이어지는 미국 주도의 연합국 정상들이 일련의 회담을 통해 ▲전쟁책임 명기, ▲배상금 지불, ▲영토할양 등으로 하는 전범국 일본에 대해 징벌하는 조치로서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이를 기초로 미국의 대일본영토 처리원칙을 ▲일본이 포기해야 할 도서(島嶼) 영토 특정, ▲경도-위도선을 활용한 선 긋기 방식의 경계선 구분, ▲시각적으로 명확히 하기 위한 부속지도첨부 등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원칙들은 카이로선언을 거쳐 포츠담선언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건은 이행되어야 하고, 일본의 영토주권은 주요 4개 섬과 연합국이 이미 결정한 모든 작은 섬으로 제한한다.”라고 함으로써 패전국 일본에 대한 가혹한 징벌적 개념적 규정과 함께 영토 관련 사항을 좀 더 명확히 확정했다.
두 번째는 전후 미국의 대일영토정책의 불완전한 유지 단계(1945년~1949년)다.
이 시기는 종전 후 미·소 간 유럽발 냉전의 동아시아화가 1948년을 기준으로 8월과 9월 각각 한반도 남북분단 정권수립과 중국대륙의 공산화(1949.10.1.), 한국전쟁 발발(1950.6.25.) 그리고, 중공군 참전 (1950.10.19.) 등으로 발현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냉전의 발현은 미국이 주도한 기존 전범국 징벌적 대일정책이 동아시아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반공보루의 파트너로 재설정되어 소위 역코스(Reverse Course Policy)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징벌적 대일강화조약이 비징벌적이고 관대한 대일평화조약 체결로 나아가는 복선이 되었다. 1949년 후반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로 바뀌는 또 하나의 변수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종전 후 연합국최고사령관 맥아더 지령인 스카핀(SCAPIN)-제677호(1946.1.29.)를 시작으로 1949년 11월 2일까지 생산된 대일평화조약 임시초안들(1947.1~1949.11.2.)과 같은 해 12월 19일<연합국의 구일본영토처리에 관한 비밀합의서> 등 문건들에서 징벌적 대일영토정책의 원칙들이 적용되어 독도가 한국영토로 지도와 함께 명확히 표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11월 14일과 19일에 지독한 친일본 성향의 연합국최고사령부 외교국장 겸 주일미정치고문 월리엄 시볼드(William J. Seabald)가 미 국무부에 제출한 의견서와 보고서의 영향으로 1949년 12월 29일자 초안부터 1950년 7월까지 작성된 미국 국무부의 조약 초안에서는 독도가 돌연 일본영토로 표시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역코스정책으로 인해 변화된 대일정책의 기조 위에서 시볼드의 최종 보고서의 등장은 전시 중에 연합국이 합의한 원칙들의 주춧돌이 하나 하나 침식·거세되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전후 미국 주도의 대일영토정책의 변화(1950년~1951년)이다.
1950년 5월 18일 대일평화조약 특사인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임명되면서 대일평화조약은 기존 구체적이고 상세한 징벌적 조약이 아닌, 비징벌적이고 간략한 단축형 조약 추구로 선회하면서 전시 중에 합의한 대일영토정책은 폐기되었다. 이때 조약 준비과정에서 장애물에 불과했던 소련을 배제한 미국의 단독강화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일본에게 전범국 면죄부 부여와 함께 1950년 8월 7일자 대일평화조약 초안부터 ‘독도’ 조항이 생략되어 이듬해인 1951년 8월 13일 최종안에 이어 정식 조약에까지 독도는 영토조항 조문에서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못하고 아예 생략되어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때 한국 외무부와 주미한국대사관(대사 양유찬, 서기관 한표욱 등)이 독도 위치에 대한 미 국무부 거듭된 확인 요청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몫했다. 이 시기에 특히 한 것은 영국이 미국의 일방적인 독주에 반발하여 1951년 초반에 영국은 자체적으로 대일평화조약 초안을 3차에 걸쳐 작성하면서 독도를 지도와 함께 한국 영토로 명기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정식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 영토 조항에서 독도 귀속 여부에 대한 언급 없이 생략한 상태에서 체결함으로서 70여 년간 한일 간의 분쟁의 단초가 되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대일평화조약 체결 전까지 독도는 한국영토로 표기되었다가 (1946.1~1949.11.2.) 돌연 일본영토(1949.12.29.~1950.7)로, 그리고 또 다시 초안(1950.8~1951.8)과 본 조약(1951.9.8.)에서는 독도가 아예 생략되는 롤로코스터 형국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일평화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정부는 한반도 주변 수산자원보호를 명분으로 독도를 포함한 『대한민국인접해양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선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독도)가 포함된 일방적인 선포는 침략행위이다”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 기점이 바로 독도 귀속권을 둘러싼 한일 양국 간 분쟁의 발화점이면서 동시에, 국제법상 분쟁의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시점 이후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양국 간의 갈등과 대립이 극도로 격화되자, 1953년 12월 미국 정부는 독도분쟁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이 기존 독도에 대한 모든 사안에 대해 최종 결정권자에서 중립 선언을 통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자 입장으로 선회함으로써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과 대립을 70년 넘게 오늘날까지 지속된 근본적인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대독도에 대한 일련의 행태는 냉전시기 동아시아 안보전략상 자국의 이익에 기초하여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결정권자로서 임의로 처분·결정하고, 이후 한일 간 분쟁이 격화되자 중립을 선언하며 방관자로 입장을 바꾸면서 한일 양국에게 영토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임을 자청한 형국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독도에 대한 일련의 행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결국은 독도문제의 본질은 역사적 권원(고유영토론)문제도 아니요, 국제법상 문제가 아닌, 바로 냉엄한 국제정치의 논리의 문제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에 대한 해법은 바로 국제정치에서 원론적이지만 만고의 영원한 진리인 ‘강력한 힘‘을 가질 때만이, 강력한 실천적 이성으로 입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옮길 때만이, 우리 대한민국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을 수호할 수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글: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정원식 연구위원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