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전원철 연구위원 (원문)
고대사에서 우리 한민족사뿐만 아니라, 일본사와 연관해서도 중요한 우리 고대국가가 육가야 연맹이다. 이 가야연맹은 시조 김수로가 세운 가락국을 포함하여 그의 여섯 형제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나라들이다. 이 중 대표적인 나라인 가락국은 시조 김수로왕을 1대로 하여 모두 10세대 491년을 전하였으나, 신라에 통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단, 이 가락국 왕가의 가문인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제1 대성이고 그 뒤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씨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문의 시조인 ‘뇌질청예腦窒靑裔’, 곧 김수로와 그 부인 허황옥이 과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문점들이 있고 사람들의 토론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제 이 사실을 육가야의 탄생과 그 중심인 가락국의 시조 ‘뇌질청예’를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고 이 가문의 뛰어난 인물들 중 대표적 몇 명을 살펴보자.
가락국과 육가야 연맹의 탄생
가락국 시조와 그 역사를 알려주는 이른 시기의 사서는 고려 초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 속의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다. 그 뒤 조선 시대에 와서도 여러 문집이나 사서에서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 사서들보다는 비록 좀 늦게 찬술된 사서이기는 하지만, 특히 이 왕조의 역사를 간략하게 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 사서가 있다. 보통 《기언》이라고 줄여 부르는 《미수기언眉叟記言》이 그것이다. 이 책은 조선후기 1689년에 문신이자, 학자인 허목이 역대의 시가와 산문, 역사 기록을 엮어 간행한 문집이다. 이 책은 특히 다른 문집들이 싣지 못한 귀중한 전대의 역사기록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언》을 통하여 가야사를 훑어보자.
“가락은 신라의 남쪽 경계 바닷가에 따로 떨어진 나라이다.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다. 시조가 화생化生한 때는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이다. 아홉 부락의 아홉 명의 간干이 신명神明하다고 여겨 처음 탄생한 자를 추대하여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호를 수로首露라고 하고, 성을 김金이라고 하였으며, 국호를 가락이라고 정하였다. 또는 가야伽倻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가락가야駕洛伽倻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탄생한 다섯 사람이 각각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첫째는 아나가야阿那伽倻(지금의 함안군咸安郡), 둘째는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현咸昌縣), 셋째는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현高靈縣), 넷째는 벽진가야碧珍伽倻(지금의 성주목星州牧), 다섯째는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현固城縣)라고 한다.” 《기언》 33권 동사東事.
이 사서에 언급된 ‘아나가야阿那伽倻 ’와 관련하여 조선 성종에서 중종 시기에 활동하였던 문인 이맥(李陌, 1455~1528)이 쓴 《태백일사太白逸史》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그와 거의 같은 나라 ‘안라가야安羅迦耶’를 언급하며, 그 위치를 일본지역에 비정하는데, 이는 우리 땅 경남 함안군에 자리잡았던 ‘아나가야阿那伽倻’의 일본 분국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태백일사》는 “일본日本에는 옛적舊에 … 이세국伊勢이 있어 왜倭와 함께 이웃하는데同隣 이도국伊都國은 치쿠지筑紫, 곧 일향국日向國이다. 이로부터自是 동쪽東은 왜倭에 속하고, 그 남동其南東은 안라安羅에 속하는데, 안라는 원래本 홀본인忽本人이다. 북北에는 아소산阿蘇山이 있다. 안라安羅는 나중에 임나任那에 들어갔는데, 고구려高句麗와 이미 일찌기早已 혼인한定親사이이다.” 고 한다.
여섯 가야국 중 하나인 아나가야阿那伽倻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안라가야가 일본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6가야 중 하나가 일본에 분국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다른 사서가 기록하지 못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일본의 식민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뒤엎을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가야시조의 탄생 시기는 신라와 고구려 보다 조금 늦은 한나라 건무 년간
그렇다면 그 6가야 중 가락국 시조가 태어난 시기는 언제이며 당시 주변 상황은 어떠했던가?
방금 인용한 《기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태곳적 바다 모퉁이의 우리나라는 사람과 생물의 탄생이 가장 늦었다. 요 임금 시절에 비로소 단군이 있었고, 한나라 시절에 이르러서 혁거세赫居世, 금와金蛙, 주몽朱蒙, 알지閼智와 모라毛羅의 양씨良氏ㆍ고씨高氏ㆍ부씨夫氏가 있었으니, 모두 인도人道를 인함이 없이 화생化生하였다. 또 건무建武 연간에 여섯 가야의 군왕이 있었는데, 그들의 탄생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기언》은 이 신라 박씨, 부여의 해씨, 고구려의 고씨, 신라 김씨, 그리고 제주도의 탁라국의 고·양·부씨 가문들이 모두 대략 비슷한 시기에 우리 역사에 나타났음을 전한다.
가야산 신녀神女와 이비가夷毗訶 사이의 아들인 가락가야 시조 뇌질청예腦窒靑裔 김수로와 대가야의 군왕 이진아치伊珍阿致 뇌질주일腦窒朱日 형제의 족원
이제 가락국 김수로의 가문과 그의 6형제가 세웠다는 육가야 연맹의 가문 기원을 보자. 지난 15년 전부터 김해김씨를 포함한 이 가야김씨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경주김씨와 같은 흉노匈奴족 출신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널리 퍼뜨려져 왔다. 6가야의 기원에 관해 이른바 일본제국주의 침략사를 바로잡고 ‘국사찾기’를 펼쳤다고 알려진 문정창 선생이 40년 전에 선창하고 지난 2011년부터는 건대 사학과 출신의 서동인 작가가 뒤를 이은 오류로 가득찬 학설이다. 이들은 한 줄로 줄이자면, “가야김씨는 경주김씨의 선조이고, 경주김씨가 흉노이므로 가야김씨도 흉노이다.”는 그릇된 썰을 퍼뜨려, 그 썰이 강단 및 재야 사학계를 뒤흔들었다.
이 중 문정창 선생의 썰은 ‘가야 시조들 흉노 썰’을 지어낸 최초의 인물인데, 심지어 가락김씨 문중도 이들의 주장을 군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78년에 자신이 쓴 《가야사》에서 “육가야의 건설자인 여섯 개의 알은 신라 남해왕 4년 서기 7년 한나라 평제平帝를 살해하고, 2백년 사직의 전한前漢을 찬탈하여 17년 사직의 ‘신제국新帝國’을 건설하였던 왕망王莽의 족당族黨이었을 것이다.” 고 했다. 그는 이렇다 할 사서의 근거도 없이, ‘왕망王莽’이 흉노족이며, 그가 6가야 김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잘못된 썰을 제기한 것이다. 심지어 이름난 역사학 박사 이덕일조차도 《경기신문》에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김수로왕은 흉노왕의 후손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문정창의 썰을 인용한 바 있다.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들이 자신들을 흉노의 후손으로 여기는 계기가 된 저서도 바로 이 문정창이 출간한 《가야사》이다.
문정창에 이어서 서동인은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 실크로드의 지배자 가야를 세우다(주류성, 2011)》라는 저서를 통해 문정창의 그릇된 썰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는 이 저서에서 “흉노인 김씨들 중국황실을 장악하다”는 소제목 아래 한나라에 투항한 흉노왕 김일제金日磾의 네 아들과 그 손자인 투후 김당金當의 계보를 문정창의 썰을 이어 자기 나름대로 왕망의 계보로 재구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문정창의 선창에 이어 그 취지와 같은 억지 “썰” 하나를 날조해 내었다. 왕망은 원래 서한西漢 왕가의 외척이었으나,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서동인은 투후의 한 후손인 “김당金當의 아들 가운데 만曼이 있었고 그 만의 아들이 왕망이므로 왕망은 김당의 손자라는 사실이 추출되는 것이다.”(129쪽) 라고 한다. 서동인은 이 왕망이 흉노 투후 김일제의 현손이라고 한다. 즉 왕망의 고조부가 김일제라는 이야기이다.
나아가 원래 김씨인 왕망이 가야와 신라 김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상… 《사기》와 《전한서》와 《후한서》 기록에 기초하여 그 진실을 추적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씨의 유래, 왕망(=김망)과 김씨의 관계를 추적한 결과… [*왕망은 김씨 가문이므로] 왕망을 원래의 성씨로 복권시켜 이제부터는 김망 또는 김왕망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 왕망은 [*서동인 자신이 풀어낸 수수께끼의 해답을 통해 볼 때] 본래 김씨였으므로 김해로 내려온 김씨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다. 나아가 낙랑에 들어가 한의 읍군이 되고, 철관으로 변신하였다.” “[한인韓人 읍군邑君] 소마시[*서동인은 소마시가 김수로라고 한다 설명]…는 김일제의 7 세손을 포함해 김일제, 김륜의 후손임에는 틀림없다.”고 한다.(145쪽)
그러나 왕망이 한인 읍군 소마시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곧 읍군 소마시가 왜 왕망의 후손인지 전혀 사서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일방적 선언만 하였고, 또 소마시가 어떻게 김수로와 동일인인지에 관해서도 전혀 입증할 근거도 대지 않고, 소마시와 김수로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에 앞서 서동인은 왕망이 ‘투후 김일제의 현손’, 곧 4대손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는데, 그의 주장과는 달리 왕망은 전혀 김일제의 후손도 아니며, 나아가 또 그의 4대손도 전혀 아니다. 우선 《한서》 ‘김일제전’에 기록된 김일제 4 세대의 계보를 보자. 이 족보에는 형인 김일제와 아우 김륜 2사람의 계보가 나와 있다. 김일제 → (아들) 건 → (손자) 김당의 아버지(일명?)→ (증손) 김당이라는 4 세대의 족보이다. 김일제의 아우 김륜은 아들과 손자가 나오나 그 뒤부터는 계보가 안 나온다. 다음 순으로 《한서》 원후전에 나오는 왕망의 계보를 보면, 그 계보는 왕옹유 → (아들) 왕금 → (손자) 왕망 아버지 만 → (증손) 왕망이라는 4 세대의 계보가 있다.
위의 두 사서에 나오는 김당과 왕망의 가계도를 보면 왕망과 김당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가문 소속이고, 서동인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같은 김씨 가문의 현조(고조) 할아버지와 현손 사이가 전혀 아니다. 또 위의 《한서》는 ‘투후 김일제의 증손(3세손)’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나, 서동인은 ‘투후 김일제의 현손(4세손)’이라는 언급을 하여 잘못된 기술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왕망은 김당의 손자”라고 했으나, 위 사서들의 기록에는 왕망과 김당은 성씨도 계보도 다른 이종사촌 사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김당과 왕망의 사이는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功顯君과 김당의 어머니 남南을 통해 이어지는 데, 이 두 여인들은 흉노성 거씨(渠氏) 가문의 언니와 누이 사이이다. 그러므로 왕망과 김당은 같은 항렬의 이종사촌 사이이다. 그런데도 서동인은 이들을 “할아버지(김당)와 손자(왕망)” 사이로 족보를 날조하고는 따라서 왕망이 김씨라고 하는 허위사실을 주장했다.
나아가 서동인은 또 다음과 같이 사서의 기록과는 다른 허위 사실을 주장한다.
“《김해김씨선원세보》에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선조 김수로는 물론,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와 그의 후손들 모두 소호 김천씨의 후예이며 김당의 후손이라고 밝혀 놓았다. 《삼국사》에 이르기를 신라의 시조는 소호 김천씨의 후예인 까닭에 이름은 김당이라고 하였다. 신라고서에는 김알지는 금관국 수로의 후예라고 하였다. 또 《김해김씨선원세보》에 ‘경주김씨의 시조 알지는 수로왕의 후예’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해김씨 문중에서 보여주는 《김해김씨선원세보》에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선조 김수로는 물론,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와 그의 후손들 모두 김당의 후손”이라는 그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서동인이 족보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는 그 《김해김씨선원세보》가 어느 세보인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세보이다. 또 설사 그 세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보가 말하는 그 <신라고서>가 도대체 어떤 고서인지, 또 현존하는 사서인지도 알 수가 없다. 물론 <삼국사>에는 신라의 시조는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고 한 기록은 있다. 그러나 그 시조가 김당이라고 한 기록은 없다. ‘경주김씨의 시조 알지는 수로왕의 후예’라고 적은 《김해김씨선원세보》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서동인은 이처럼 《한서》 김일제전과 원후전의 계보와는 전혀 다른 날조된 계보를 기반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 하나의 《김해김씨선원세보》를 급조하여 김해김씨를 왕망의 후손이자, 흉노의 후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서동인과 문정창의 이 허망한 “썰”들은 이제 제쳐두자. 그 대신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된 김해김씨 시조의 이야기와 그 성씨의 어원, 그리고 6가야 연맹의 하나로 일본으로 진출했다는 안라가야安羅迦耶 왕가가 고구려와 연이어 혼인했다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기록과 같은 사료들을 통하여 이 가문의 족원을 검토해보자. 그러면 이 씨족은 흉노가 아니라, 명백히 부여계임이 드러난다. 나아가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 선생의 연구가 밝히듯이, 가야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흉노계와는 전혀 다른 부여계 유물과 같다는 사실도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