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한국인 스토리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01. 삶의 의의

내 생각으로는 삶의 의의를 묻는 사람에게는 그 해답이 주어지지 않지만
한 번도 그런 것을 묻지 않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그 해답이 주어지는 듯이
여겨진다…
내가 의식을 잃기 시작했던 그 순간 이상으로
그렇게 삶이 강렬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02. 사랑의 감정 1

나는 불을 켜고서 술병 두 개를 움켜 쥐었다.
계단에서 나는 그것이 주스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다시 돌아가서 포도주 병을 찾아내었으나 이번에는 불을 끄는 것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또 다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03. 상상해봐

상상해 봐. 언니가 스물 두 살된 딸을 가졌고 그 애가 아주 순진한 애였는데
언니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봐.
그 애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리고 모험을 하고 싶어 바아에 갔다.
그런데 그 애는 아직 한 번도 바아에 가본 일이 없었다…
그 애는 이것저것을 마구 뒤섞어서 마셨지.
그리고 습관이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애는 유쾌해지기는 고사하고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 되고 결국은 자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애를 호텔의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애가 너무도 선뜻 나서는 것을 보고
그 남자는 그 애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닥쳐올 것이 온 거야.
그 남자는 그 애가 반항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이윽고 이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지.
그 사람은 일어나 창가로 가서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그것을 마당으로 내던져 버렸어
그 아이는 가 버리고 혼자서 말이야…
언니는 그런 딸의 이야기를 알겠어?

04. 인생

때로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 만한 위험이 없는 생이란 무가치한 것이다.

05. 우울

모든 아름다운 것이 다 헛된 것에 불과하며 다만 몇 시간 동안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나무와 극장과 신문의 한가운데 살고 있어도
우리는 차가운 달 위로 쫓겨난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고독하다는 것을 한 번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해지는 법이다…
우울증은 다만 인생의 시발점일 뿐이다.

06.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대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는 터에 말이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조차도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법이며,
나이가 들면 들어 갈수록 고양이처럼 사는 것을 배우게 된다.
점점 더 소리를 내지 않고 점점 더 적대하는 것이 줄어들면서.
그것이 아마 늙어간다는 징조이리라.

07. 친절과 증오

증오도 또한 어떤 다리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내게 대해 느끼는 것이 증오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관심한 친절보다는 차라리 증오가 더 달가울 터이다.

08. 사랑의 감정 2

니나는 잠자코 차를 따랐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게 감동을 주었다.
갑자기 니나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 왔다.
그 순간 나는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오히려 아직 한 번도 말해본 일이 없었다고나 할 온갖 사랑의 말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정열의 억센 힘이 자신을 돌처럼 굳게 만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니나가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내 곁에 바싹 닥아서 있었다.
그녀가 차를 따랐다.
한 순간 그녀의 팔이 나를 스쳤다.
순간은 지나갔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09. 사랑의 감정 3

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니나는 오랫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바람이 니나의 머리를 흩날렸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10. 고독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모든 인간은 고독하다는 것과
또 그것은 어쩔 수가 없고 끔찍한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욱 가난하고 고독해지는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털어 놓으면 털어 놓을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데는 침묵 속의 일치 밖에는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11. 사랑의 감정 4

선생님은 저보다도 훨씬 연상이고 또 현명하십니다.
저는 선생님의 일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선생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우정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저를 부자연스럽게 만듭니다.
선생님은 저를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수줍어 하는 어린 처녀로 만드시면서
동시에 성숙한 여인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을 제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발 제가 그 둘 중의 어느 하나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요.
자유로운 몸이어야 하겠다는 것 외에는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
도 없습니다.
저는 수 백의 가능성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 심중의 모든 것은 그러나 아직 미정이고 이제 막 그 출발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무슨 일에 자신을 고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12. 운명

대부분의 사람은 운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그들은 운명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 한번의 커다란 충격 대신에 수 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커다란 충격은 사람을 앞으로 끌고 가지만 작은 충격들은 사람을 점점
진창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그건 아프지는 않다. 타락은 오히려 편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파산 직전의 사업가가 그 파산 상태를 숨기고자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대고는
일생 동안 불안해 하며 그 이자를 갚아나가는 소인으로 지내는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나로서는 그러나 파산을 선언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편을 택하고 싶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길을 가다가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경우엔
언제나 그것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소설 1

우리는 사실 영웅이 아니다.
다만 때로 그런 척 해볼 뿐이다.
우린 모두가 비겁하며 조금씩은 타산적이고 이기적이며 위대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선량한 동시에 사악하고, 영웅이면서 비겁하며, 인색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관대하다는 것을,
모든 것이 상반된 듯하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어울려 있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이건 좋은 짓이건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아주 단순화시켜 생각하려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14. 소설 2

독자는 재미있는 것을 원한다.
작자는 그들에게 쉽게 따라올 수 있는 편한 이야기를 제공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저런 일이, 그리고 또 다음에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는 해피 엔딩이고 아니고 간에 원만한 결말을 지어야 한다.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끝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사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에는 꼭 들어맞는 정산이란 없는 것이며 그런 결말도 없는 법이다.
인생이란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으로
모든 것은 얼키고 설키어 아주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논리도 없다.
전부가 즉흥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기에서 작은 토막을 끌어내어
현실에는 있지도 않고 인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다만 우스울 정도의 것으로
조촐하고 자그마한 구도에 따라 소설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15. 행복

행복이란 한 순간이나 한 시간, 혹은 길면 하루 동안
내 인생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음을 뜻한다.

16. 인생

사람은, 아무리 싫은 일이라 해도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 일에 결국은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아니 완전히 길들여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럴 생각만 있다고 한다면 완전히 참을 수 없는 그런 인생의 상황이란 없
다는 것이다

17. 결혼

여자들이란 언제나 우리를 실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도 역시 여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 진실한 결혼 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체념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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