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을 알고계신가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등과 같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생소한 이름입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서 보다는 민족 사학자로 더 익숙한 분입니다.
신채호 선생의 저서로는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한
[조선 상고사]가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위와 같이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학자이지만 조국의 광복을 위해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 든 진정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일생을 보자면,
1907년 신민회, 국채보상운동 참여.
1907년 순 한글 <가정잡지> 편집 발행.
1909년 일진회 성토에 앞장섬.
1910년 중국 칭다오로 망명. 권업신문에서 활동.
1915년 상하이 신한청년회 조직 참가.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가.
1923년 민중의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를 주장,창조파의 주동역할.
1925년 무정부주의 신봉.
1927년 신간회 발기인.
1928년 잡지 <탈환>발간.
외국환을 입수하고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자룽항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1936년 옥사.
이와 같이, 한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에 바친 분입니다.
곧고 굳은 나무같은 성품의 신채호 선생.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직 민중의 혁명을 통해서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뜻이 맞지 않자 비밀 결사단체를 조직하고 직접 민중의 손으로 독립을 이루어내려 했습니다.
이는 신채호 선생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선생이 얼마나 확고한 신념의 사람이였는지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부인도 독립운동가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인 박자혜 선생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박자혜 선생은 간호부에 근무하는 간호사였는데, 3.1운동 당시 많은 부상자들을 보고 민족의 울분을 느껴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며 여성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녀는 ‘간우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동맹 파업을 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북경으로 건너가 생활을 하다 1920년 봄.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첫 아들을 출산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북경에 있는 신채호 선생을 두고 국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국내로 돌아온 후 지속적으로 남편과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합니다.
이렇게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선생은 국내에서 그리고 북경에서
함께 독립운동에 힘을 쓴 인생의 반려자이자 동료였습니다.
뤼순감옥에서 옥사한 신채호 선생을 보는 박자혜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신채호 선생은 2009년까지 무국적자였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살다 간 신채호 선생의 아들 이야기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1912년 일본의 호적 재편 시 호적 등재를 거부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도 이 호적이 그대로 유지되어 신채호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는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2009년 2월. 사망한 독립유공자에 대해 새로이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법이 개편되면서
신채호 선생은 대한민국 국적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아들도 신채호 선생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뒤늦게라도 신채호 선생의 호적문제가 정리 되었듯,
다른 독립 운동가, 독립 유공자들의 잃어버린 호적들도 점차 자리를 찾아갔으면 합니다.
출처: 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